창39: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형통(亨通)’이 무엇일까? 흔히 형통을 내 뜻대로 일이 잘 풀리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 속 요셉의 형통은 이런 상식을 뒤엎었다. 창세기 속 요셉의 삶을 통해 나타난 '형통(Prosperity)'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세상적인 성공과는 그 결이 다름을 보게 된다. 성경은 노예로 팔리고 억울하게 옥에 갇힌 그를 향해 역설적이게도 “범사에 형통했다”고 기록했다. 범사란 모든 일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감옥에 갇혔는데 범사 형통이라고 할까?
오늘 말씀은 요셉의 주인 보디발이 노예인 요셉을 형통한 사람으로 보고 있다. 하나님의 인도로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있게 되었다. 39:2”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나.” 여기 애굽의 군대 장관 보디발과 히브리 노예인 요셉 누가 더 형통한 사람일까? 세상 기준으로 보면 노예 요셉이 주인 보디발을 형통한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보디발이 노예를 형통한 사람으로 보았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형통의 성경적 의미를 깊게 이해하고 우리 삶을 다시 설정할 수 있다. 2, 3절에 반복되는 단어가 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렇다면 1.’형통’의 정의는 "환경"이 아닌 "동행"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요셉이 노예로 팔려 간 가장 비참한 순간에 역설적으로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라고 기록했다. 노예로 팔려간 것도 형통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로 하나님이 동행했다는 것이다. 그럼 요셉에게 진정한 형통은 하나님의 동행에 있었다.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이 그와 함께 했다. 이것을 성경은 노예인 요셉을 형통한 사람으로 본 것이다.
묻는다. 누구의 뜻대로 되는 것이 진짜 형통일까? 내 뜻대로였다면 요셉은 결코 감옥에 가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의 소원과는 다르게 그는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오랜 세월 감옥에 갇혔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 안에서는 감옥조차 거대한 구원을 위한 축복의 재료였음을 우리는 알게 된다. 그렇다. 형통은 환경의 안락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동행’에 있다.
많은 사람은 문제가 해결되고 부유해지는 것을 형통이라 믿지만, 성경적 형통은 내가 어디에 있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하느냐’에 달려 있다. 감옥에 있어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그곳이 형통의 현장이며, 궁전에 있어도 하나님이 부재하시면 그 삶은 결핍된 삶이다. 꼭 기억한다. 비록 우리 상황이 최악일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한다면 그는 형통한 사람이다. 왜?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이 내 삶에서 진행되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가장 완벽한 형통이기 때문이다.
‘형통’의 ‘과정’으로서 믿음의 "해석"의 능력이 중요하다. 요셉의 형통은 고난을 거부하는 능력이 아니라, 고난을 하나님의 섭리로 재해석하는 능력에서 본다. 이런 형통에 대한 해석은 상처를 넘어서게 해 준다. 형들에 의해 팔려 가고 보디발의 아내에게 모함을 당했을 때, 요셉은 복수심에 매몰되지 않았다. 훗날 창45:8에서 그는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했다.요셉은 자신이 겪은 고통의 시간들은 총리가 되기 위한 '경영 수업'이자 '성품 훈련'의 기간임으로 해석했다.
나는 우리 교회의 54년을 믿음으로 해석하고 있다. 우리 교우들은 이 지역에서 착하고 순한 교우들이다. 지난 54년 간 그들은 최선을 다했다. 나도 그들과 함께 교회를 성경의 틀안에서 움직이려 애썼다. 물론 완벽한 모습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려 했던 적은 없는 우리 교회의 지난 54년이다. 54년 된 우리 교회의 역사속에서 우리들의 계획이 틀어지고 어려움이 찾아왔었다. 이것을 해석하는 능력, 즉 하나님이 동행했기에 이 자리까지 이르렀다는 고백이다. 형통은 하나님의 정확한 타이밍이다. 형통은 그 긴 고난의 기다림을 통해 완성된다.
‘형통’의 목적은 "나"를 넘어 "우리"로 이다. 하나님이 요셉을 형통하게 하신 최종 목적은 요셉 한 사람의 출세가 아니었다. 요셉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통로로서의 삶이다. 요셉의 형통 덕분에 이집트와 근방의 나라들이 기근에서 구원을 얻었고, 이스라엘의 뿌리인 야곱의 가족이 보존되었다. 그렇다. 결국 형통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명 중심의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진정한 형통은 나를 통해 주변이 살아나고, 공동체가 회복되는 '축복의 통로' 역할을 감당할 때 완성된다.
내가 우리 교회를 형통한 교회로 보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우리 교회를 통해서 새로운 역사가 잉태되고 있다. 새로운 세대의 출현을 위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현재 우리 교회의 모습에 대해서 낙심하지 않는 이유이다. 포기하지 않는 이유이다. 처음 시작된 한인 교회로서 많은 교회를 이 지역에서 시작하게 만들었다. 우리의 눈물과 아픔이 으로 '하나님의 임재'라는, '섭리의 신앙'이라는 줄기를 지나, '생명을 살리는 구원'이라는 열매를 맺었고 맺게 될 것이다.
형통은 요셉이 노예로, 감옥으로 꺽인 그 자리에서 시작되었다. 우리는 꺽였다면 감옥같은 상황이라면 바로 형통이 시작됨을 기대해야 한다. 우리 뜻과 목회자의 뜻이 꺾인 그 자리가 하나님의 뜻이 비상하는 형통의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 삶의 자리가 비록 광야 같을지라도,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 그 자체가 이미 형통의 시작이다. 주어진 환경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동행하시는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할 때, 요셉에게 임했던 그 놀라운 역전의 형통이 우리의 삶에도 가득하시기를 소망한다.
몽우
창39: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형통(亨通)’이 무엇일까? 흔히 형통을 내 뜻대로 일이 잘 풀리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 속 요셉의 형통은 이런 상식을 뒤엎었다. 창세기 속 요셉의 삶을 통해 나타난 '형통(Prosperity)'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세상적인 성공과는 그 결이 다름을 보게 된다. 성경은 노예로 팔리고 억울하게 옥에 갇힌 그를 향해 역설적이게도 “범사에 형통했다”고 기록했다. 범사란 모든 일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감옥에 갇혔는데 범사 형통이라고 할까?
오늘 말씀은 요셉의 주인 보디발이 노예인 요셉을 형통한 사람으로 보고 있다. 하나님의 인도로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있게 되었다. 39:2”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나.” 여기 애굽의 군대 장관 보디발과 히브리 노예인 요셉 누가 더 형통한 사람일까? 세상 기준으로 보면 노예 요셉이 주인 보디발을 형통한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보디발이 노예를 형통한 사람으로 보았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형통의 성경적 의미를 깊게 이해하고 우리 삶을 다시 설정할 수 있다. 2, 3절에 반복되는 단어가 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렇다면 1.’형통’의 정의는 "환경"이 아닌 "동행"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요셉이 노예로 팔려 간 가장 비참한 순간에 역설적으로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라고 기록했다. 노예로 팔려간 것도 형통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로 하나님이 동행했다는 것이다. 그럼 요셉에게 진정한 형통은 하나님의 동행에 있었다.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이 그와 함께 했다. 이것을 성경은 노예인 요셉을 형통한 사람으로 본 것이다.
묻는다. 누구의 뜻대로 되는 것이 진짜 형통일까? 내 뜻대로였다면 요셉은 결코 감옥에 가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의 소원과는 다르게 그는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오랜 세월 감옥에 갇혔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 안에서는 감옥조차 거대한 구원을 위한 축복의 재료였음을 우리는 알게 된다. 그렇다. 형통은 환경의 안락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동행’에 있다.
많은 사람은 문제가 해결되고 부유해지는 것을 형통이라 믿지만, 성경적 형통은 내가 어디에 있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하느냐’에 달려 있다. 감옥에 있어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그곳이 형통의 현장이며, 궁전에 있어도 하나님이 부재하시면 그 삶은 결핍된 삶이다. 꼭 기억한다. 비록 우리 상황이 최악일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한다면 그는 형통한 사람이다. 왜?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이 내 삶에서 진행되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가장 완벽한 형통이기 때문이다.
‘형통’의 ‘과정’으로서 믿음의 "해석"의 능력이 중요하다. 요셉의 형통은 고난을 거부하는 능력이 아니라, 고난을 하나님의 섭리로 재해석하는 능력에서 본다. 이런 형통에 대한 해석은 상처를 넘어서게 해 준다. 형들에 의해 팔려 가고 보디발의 아내에게 모함을 당했을 때, 요셉은 복수심에 매몰되지 않았다. 훗날 창45:8에서 그는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했다.요셉은 자신이 겪은 고통의 시간들은 총리가 되기 위한 '경영 수업'이자 '성품 훈련'의 기간임으로 해석했다.
나는 우리 교회의 54년을 믿음으로 해석하고 있다. 우리 교우들은 이 지역에서 착하고 순한 교우들이다. 지난 54년 간 그들은 최선을 다했다. 나도 그들과 함께 교회를 성경의 틀안에서 움직이려 애썼다. 물론 완벽한 모습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려 했던 적은 없는 우리 교회의 지난 54년이다. 54년 된 우리 교회의 역사속에서 우리들의 계획이 틀어지고 어려움이 찾아왔었다. 이것을 해석하는 능력, 즉 하나님이 동행했기에 이 자리까지 이르렀다는 고백이다. 형통은 하나님의 정확한 타이밍이다. 형통은 그 긴 고난의 기다림을 통해 완성된다.
‘형통’의 목적은 "나"를 넘어 "우리"로 이다. 하나님이 요셉을 형통하게 하신 최종 목적은 요셉 한 사람의 출세가 아니었다. 요셉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통로로서의 삶이다. 요셉의 형통 덕분에 이집트와 근방의 나라들이 기근에서 구원을 얻었고, 이스라엘의 뿌리인 야곱의 가족이 보존되었다. 그렇다. 결국 형통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명 중심의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진정한 형통은 나를 통해 주변이 살아나고, 공동체가 회복되는 '축복의 통로' 역할을 감당할 때 완성된다.
내가 우리 교회를 형통한 교회로 보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우리 교회를 통해서 새로운 역사가 잉태되고 있다. 새로운 세대의 출현을 위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현재 우리 교회의 모습에 대해서 낙심하지 않는 이유이다. 포기하지 않는 이유이다. 처음 시작된 한인 교회로서 많은 교회를 이 지역에서 시작하게 만들었다. 우리의 눈물과 아픔이 으로 '하나님의 임재'라는, '섭리의 신앙'이라는 줄기를 지나, '생명을 살리는 구원'이라는 열매를 맺었고 맺게 될 것이다.
형통은 요셉이 노예로, 감옥으로 꺽인 그 자리에서 시작되었다. 우리는 꺽였다면 감옥같은 상황이라면 바로 형통이 시작됨을 기대해야 한다. 우리 뜻과 목회자의 뜻이 꺾인 그 자리가 하나님의 뜻이 비상하는 형통의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 삶의 자리가 비록 광야 같을지라도,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 그 자체가 이미 형통의 시작이다. 주어진 환경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동행하시는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할 때, 요셉에게 임했던 그 놀라운 역전의 형통이 우리의 삶에도 가득하시기를 소망한다.
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