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40:1-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최근에 한국 드라마 ‘경도를 기다리며‘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 읽었던 사뮈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책이 오버랩 되었다.
이상하게 난 이 책을 읽으면 꼭 시편 40편이 생각났다.
왜냐하면 시편 40편의 구조는 우리가 처한 상황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시편 40편은 다윗이 광야에서 썼다.
이렇게 시작한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히브리어로 보면, 제일 먼저 나오는 단어이다.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두 번 반복했는데 이것은 강조의 의미이다.
17잘 마지막도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즉 ‘기다림‘ 고백으로 끝맺는다.
나는 이것을 반복의 미학이라고 본다.
다윗의 '기다리고 기다렸더니'라는 강조는 절박함인 동시에,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하시리라는 확신의 중첩이 담겨 있다.
기다림‘ 이것이 다윗의 믿음과 삶의 기본 태도였다.
다윗에게 있어서 기다림은 어떤 의미일까?
보통 기다리는 것은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한 다음에 할 수 있는 것이 더 없어서 기다리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런데 다윗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기다린 게 아니라 기다림이 당시 그의 유일한 할 일이었다.
다윗에게 기다림은 무위의 시간이 아닌 하나의 적극적인 믿음의 행위였다.
다윗은 평생 주님을 기다리고, 주님의 일하심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하나님만 기다린 것이다.
‘기다림‘은 신자에게 최고의 덕목 가운데 하나이다.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기다리는는 것이다.
기다림은 믿음의 최고의 실력이다.
그런데 기다림의 믿음은 엄청난 갈등과 싸움이 시작된다.
이 과정을 잘 넘어서야 믿음의 실력자가 된다.
제임스 존스턴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하나님을 신뢰할 때 당신의 믿음은 당신의 마음속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하나님은 아신다는 것,
하나님이 지혜로우시다는 것,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선하시다는 것,
하나님이 모든 순간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믿기 위해서 당신은 생각 그리고 감정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기다림은 영적 전쟁이다.
영적 전쟁은 반드시 기다림으로 승리하게 되어 있다.
가까이 지내는 목사님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목사님, 가끔 이런 걱정이 듭니다.
앞으로도 내가 사역하는 이 교회가 살아 있을까요?’
의미있는 고민이요 몸부림이라고 생각된다.
난 교회를 특별하게 더 걱정하는 사람이다.
‘한국 교회가 이런 식으로 나아가면 과연 미래가 있을까? 교회가 문을 닫고 사라지지 않을까?’
종종 이런 표현을 설교에서 고백도 한 적이 있다.
지금은 이런 고민, 해야 할 때다.
이 위기의 현실에 안주하기보다 자신을 돌아보며 퇴색하고 변질되는 복음의 전당 교회를 염려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내 마음에 교회는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라는 믿음이 있다.
그럼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가 그렇게 쉽게 무너질까?
아니라는 확신이 있다.
그럼 어떻게 헤야 할까?
교회론에 이런 말이 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기에 주님이 보존하신다.”
위기 앞에 내가 할 일은 예전보다 더 그저 우직하게 목회하는 것이다.
시류를 따라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은 비즈니스지 목회는 아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께 이렇게 말했다.
난 교회를 비지니스가 아니라 주님이 맡기신 절대 목회를 했다.
목사들과 몰려다니지도 않았고 그 흔한 지역 감투 하나 쓰지 않았다.
이거 하나는 우리 교회와 주님이 안다.
교회에 충실하지 못하고,
꾀부리고,
정치나 하러 다니고,
패거리 지어 몰려다니고,
인기와 명예에 집착하는 이들이라면 걱정에 걱정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이런 부류에 해당되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교회만 충실하게 섬기면 된다.
그러면서 산모 이야기를 해 주면서 부흥을 함께 꿈꾸자고 말했다.
결혼한 여자 분들은 기다림의 의미를 안다.
아기를 10달 동안 품고 고생한다.
얼마나 갈등하겠는가?
심지어 유산까지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데 결국에는 왜 그렇게 10개월 기다리는가?
100년의 생명이 엄마 배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 생명이 태어나면 100년을 살기에 1년을 기다린다.
산모는 생명을 가졌기에 여정이 있는데 기다림이다.
그 1년의 인내를 좋은 독서의 시간, 좋은 음악을 듣고, 좋은 생각을 함으로 보낸다.
누구와 싸우지도 않고 화평하게 보낸다.
산모들은 고통스러운 시간을 이렇게 생산적으로 보내고 있다.
그 안에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것도 안하고 기다리는 것을 오래참음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 다림은 정말 고통스럽기에 ‘Long Suffering’ 이라고 부른다.
산모는 배 안에 있는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엡 4:2-3이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산모는 생명으로 인하여 모든 일에 겸손과 온유 그리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가운데서 모든 이들과 화평하게 지낸다.
산모의 이 모습이 교회다.
교회는 예수라는 영원한 생명을 품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평화로 모든 관계에서 예수 생명으로 인하여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 하는 삶을 살아간다. 우리가 품은 교회는 영원한 생명의 교회이기에 산모와 태아가 하나로 살아가듯이 주님이 묶어 주신 것을 서로 용납하면서 하나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한다.
하늘을 보며 교회 부흥에 기다림에 지친 내 자신과 교우들에게 말하고 싶다.
하나님을 향한 기다림의 순간, 우리 마음속에 수많은 갈등, 불안과 같은 내전을 일으킨다.
그러나 믿음의 기다림은 요동치는 마음의 내전을 잠재우며 신뢰를 선택하는 가장 치열한 믿음의 행위이다.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의 고도가 끝내 오지 않는 막연한 허무의 상징이라면, 다윗의 기다림은 실체가 있는 '반석'을 향한 여정이기에 끝내 믿음의 승리를 가져다준다.
우리의 기다림은 우리 내면이 가장 바쁘게 움직이는 시간이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라는 명제를 지키기 위해 불안이라는 거센 파도를 막아내고 부흥을 사모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그 '기다림'은 결코 버려지는 시간이 아닌, 가장 밀도 높은 믿음의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교회 부흥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단순히 시간이 흐르기를 바라는 수동적인 인내의 기다림이 아니라 기다림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믿음의 행위이기 때문에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에게 기다림은 무위의 시간이 아닌 하나의 적극적인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행위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과 감정이 하나님의 주권을 앞서지 않도록 붙잡는 '영적 브레이크'이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다.
그 분의 교회이다.
나처럼 그 분의 종들이 시원찮아서 그렇지 교회는 주님의 교회,
주님께서 때가 되면 시원찮은 종들은 갈아치우고 다시 새롭게 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우직하게 목회한다면 주인이신 주님을 믿고 끝까지 가보아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가느냐는 것이다.
여전히 이 시대에 하나님의 부흥을 품고가는 것이다.
부흥을 여전히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이다.
몽우
시40:1-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최근에 한국 드라마 ‘경도를 기다리며‘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 읽었던 사뮈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책이 오버랩 되었다.
이상하게 난 이 책을 읽으면 꼭 시편 40편이 생각났다.
왜냐하면 시편 40편의 구조는 우리가 처한 상황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시편 40편은 다윗이 광야에서 썼다.
이렇게 시작한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히브리어로 보면, 제일 먼저 나오는 단어이다.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두 번 반복했는데 이것은 강조의 의미이다.
17잘 마지막도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즉 ‘기다림‘ 고백으로 끝맺는다.
나는 이것을 반복의 미학이라고 본다.
다윗의 '기다리고 기다렸더니'라는 강조는 절박함인 동시에,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하시리라는 확신의 중첩이 담겨 있다.
기다림‘ 이것이 다윗의 믿음과 삶의 기본 태도였다.
다윗에게 있어서 기다림은 어떤 의미일까?
보통 기다리는 것은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한 다음에 할 수 있는 것이 더 없어서 기다리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런데 다윗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기다린 게 아니라 기다림이 당시 그의 유일한 할 일이었다.
다윗에게 기다림은 무위의 시간이 아닌 하나의 적극적인 믿음의 행위였다.
다윗은 평생 주님을 기다리고, 주님의 일하심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하나님만 기다린 것이다.
‘기다림‘은 신자에게 최고의 덕목 가운데 하나이다.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기다리는는 것이다.
기다림은 믿음의 최고의 실력이다.
그런데 기다림의 믿음은 엄청난 갈등과 싸움이 시작된다.
이 과정을 잘 넘어서야 믿음의 실력자가 된다.
제임스 존스턴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하나님을 신뢰할 때 당신의 믿음은 당신의 마음속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하나님은 아신다는 것,
하나님이 지혜로우시다는 것,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선하시다는 것,
하나님이 모든 순간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믿기 위해서 당신은 생각 그리고 감정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기다림은 영적 전쟁이다.
영적 전쟁은 반드시 기다림으로 승리하게 되어 있다.
가까이 지내는 목사님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목사님, 가끔 이런 걱정이 듭니다.
앞으로도 내가 사역하는 이 교회가 살아 있을까요?’
의미있는 고민이요 몸부림이라고 생각된다.
난 교회를 특별하게 더 걱정하는 사람이다.
‘한국 교회가 이런 식으로 나아가면 과연 미래가 있을까? 교회가 문을 닫고 사라지지 않을까?’
종종 이런 표현을 설교에서 고백도 한 적이 있다.
지금은 이런 고민, 해야 할 때다.
이 위기의 현실에 안주하기보다 자신을 돌아보며 퇴색하고 변질되는 복음의 전당 교회를 염려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내 마음에 교회는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라는 믿음이 있다.
그럼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가 그렇게 쉽게 무너질까?
아니라는 확신이 있다.
그럼 어떻게 헤야 할까?
교회론에 이런 말이 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기에 주님이 보존하신다.”
위기 앞에 내가 할 일은 예전보다 더 그저 우직하게 목회하는 것이다.
시류를 따라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은 비즈니스지 목회는 아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께 이렇게 말했다.
난 교회를 비지니스가 아니라 주님이 맡기신 절대 목회를 했다.
목사들과 몰려다니지도 않았고 그 흔한 지역 감투 하나 쓰지 않았다.
이거 하나는 우리 교회와 주님이 안다.
교회에 충실하지 못하고,
꾀부리고,
정치나 하러 다니고,
패거리 지어 몰려다니고,
인기와 명예에 집착하는 이들이라면 걱정에 걱정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이런 부류에 해당되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교회만 충실하게 섬기면 된다.
그러면서 산모 이야기를 해 주면서 부흥을 함께 꿈꾸자고 말했다.
결혼한 여자 분들은 기다림의 의미를 안다.
아기를 10달 동안 품고 고생한다.
얼마나 갈등하겠는가?
심지어 유산까지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데 결국에는 왜 그렇게 10개월 기다리는가?
100년의 생명이 엄마 배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 생명이 태어나면 100년을 살기에 1년을 기다린다.
산모는 생명을 가졌기에 여정이 있는데 기다림이다.
그 1년의 인내를 좋은 독서의 시간, 좋은 음악을 듣고, 좋은 생각을 함으로 보낸다.
누구와 싸우지도 않고 화평하게 보낸다.
산모들은 고통스러운 시간을 이렇게 생산적으로 보내고 있다.
그 안에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것도 안하고 기다리는 것을 오래참음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 다림은 정말 고통스럽기에 ‘Long Suffering’ 이라고 부른다.
산모는 배 안에 있는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엡 4:2-3이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산모는 생명으로 인하여 모든 일에 겸손과 온유 그리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가운데서 모든 이들과 화평하게 지낸다.
산모의 이 모습이 교회다.
교회는 예수라는 영원한 생명을 품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평화로 모든 관계에서 예수 생명으로 인하여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 하는 삶을 살아간다. 우리가 품은 교회는 영원한 생명의 교회이기에 산모와 태아가 하나로 살아가듯이 주님이 묶어 주신 것을 서로 용납하면서 하나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한다.
하늘을 보며 교회 부흥에 기다림에 지친 내 자신과 교우들에게 말하고 싶다.
하나님을 향한 기다림의 순간, 우리 마음속에 수많은 갈등, 불안과 같은 내전을 일으킨다.
그러나 믿음의 기다림은 요동치는 마음의 내전을 잠재우며 신뢰를 선택하는 가장 치열한 믿음의 행위이다.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의 고도가 끝내 오지 않는 막연한 허무의 상징이라면, 다윗의 기다림은 실체가 있는 '반석'을 향한 여정이기에 끝내 믿음의 승리를 가져다준다.
우리의 기다림은 우리 내면이 가장 바쁘게 움직이는 시간이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라는 명제를 지키기 위해 불안이라는 거센 파도를 막아내고 부흥을 사모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그 '기다림'은 결코 버려지는 시간이 아닌, 가장 밀도 높은 믿음의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교회 부흥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단순히 시간이 흐르기를 바라는 수동적인 인내의 기다림이 아니라 기다림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믿음의 행위이기 때문에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에게 기다림은 무위의 시간이 아닌 하나의 적극적인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행위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과 감정이 하나님의 주권을 앞서지 않도록 붙잡는 '영적 브레이크'이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다.
그 분의 교회이다.
나처럼 그 분의 종들이 시원찮아서 그렇지 교회는 주님의 교회,
주님께서 때가 되면 시원찮은 종들은 갈아치우고 다시 새롭게 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우직하게 목회한다면 주인이신 주님을 믿고 끝까지 가보아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가느냐는 것이다.
여전히 이 시대에 하나님의 부흥을 품고가는 것이다.
부흥을 여전히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이다.
몽우